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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서울 속 생존 아파트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공간 생존주의)

by commalog 2025. 8. 26.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이후 붕괴된 서울 한복판,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 아파트를 배경으로 생존자들의 갈등과 생존 본능을 그린 한국형 재난 드라마입니다. ‘재난’이라는 외부 환경보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 심리, 권력의 작동 방식, 공동체의 파열음 등을 정교하게 묘사하며 단순한 장르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특히 황폐해진 서울 도심 속 살아남은 한 아파트라는 설정은 공간 그 자체가 곧 권력, 생존, 심리적 갈등의 무대가 됩니다. 본 글에서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공간 생존주의’를 키워드로, 유일한 생존 공간인 아파트가 상징하는 의미와 그것이 인물들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합니다.

황궁 아파트: 무너진 도시 속 권력의 심장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요 배경인 황궁 아파트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닙니다. 이는 영화 내에서 ‘생존 가능성’의 상징이자, 공동체가 붕괴한 이후 새롭게 생성된 권력 질서의 중심이 됩니다. 대지진 이후 서울 전역이 폐허가 되었지만, 유일하게 온전하게 남은 공간이 이 아파트 단지입니다. 이는 물리적인 생존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만의 공간’, ‘안과 밖의 경계’를 선명하게 설정하는 심리적 요소로 작동합니다. 외부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고, 누구든 들이닥칠 수 있는 무정부 상태지만, 이 아파트 안은 규칙과 제한, 선택된 사람만이 존재할 수 있는 폐쇄적 공간으로 변화합니다. 이때부터 황궁 아파트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닌, 권력 구조가 생겨나는 ‘유토피아’이자 ‘디스토피아’로 이중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대표 주민 ‘영탁’(이병헌 분)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내부에서 통치자처럼 군림하게 됩니다. 이 공간에서 누가 살 수 있고 누가 쫓겨나는지 결정하는 것은 기존의 법이나 윤리가 아닌,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규칙입니다. 감독은 이 아파트를 단지 재난 생존물의 배경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도시 공간의 구조가 인간 심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무너진 도시 속 살아남은 단 하나의 공간—그것이 어떻게 유토피아에서 공포의 공간으로 바뀌는지, 이 영화는 그 과정을 치밀하게 시각화합니다.

생존이 만든 경계: 안과 밖, 우리와 타자

황궁 아파트 내부에 ‘우리’가 있다면, 그 밖은 모두 ‘그들’입니다. 이분법적 경계는 영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됩니다. 외부 사람들의 진입을 막기 위한 철문, 순찰, 감시 체계는 단지 외부의 폭력을 방지하는 목적이 아니라, 내부 사람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점점 변질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이면서도, 동시에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인식 속에 점점 자신만의 윤리를 세우게 됩니다. 박서준이 연기한 ‘민성’은 처음엔 평범한 시민으로 등장하지만, 아파트 내부 권력에 동화되면서 점점 비인간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안전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점점 누군가를 밀어내고, 외면하고, 결국 폭력을 묵인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경계는 현실 속 사회 구조와도 닮아 있습니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는 누구를 받아들이고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 ‘우리 가족만은’, ‘우리 공동체만은’이라는 말 뒤에는 타인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집단 이기심이 존재합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물리적 경계가 심리적 경계를 강화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외부에서 피난 온 생존자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거부하는 부분입니다. 이때의 침묵과 냉담함은 자연재해보다도 더 무서운 인간의 본성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재난이라는 비현실적 설정을 통해, 가장 현실적인 인간 심리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도시 공간의 붕괴와 인간성의 재구성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단 한 번의 재난으로 무너졌다는 설정은 단순한 재난 연출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콘크리트로 빽빽하게 세워진 도시, 아파트라는 물리적 구조물의 안전함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지만, 살아남은 일부는 여전히 ‘질서’를 만들고, ‘계층’을 유지하려 합니다. 영화 속에서 무너진 것은 건물만이 아닙니다. 공동체, 윤리, 신뢰도 함께 붕괴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잔해 위에서 사람들은 다시 질서를 만들고, 권력을 세우며,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단순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무엇을 우선시하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아파트라는 공간은 한국 사회의 독특한 구조를 반영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개인보다 공동체, 수평보다 수직, 열림보다 닫힘을 선호하는 아파트 문화는 영화 속에서 생존의 상징으로 작동하면서 동시에 인간성의 상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박보영이 연기한 ‘명화’는 이러한 공동체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끝까지 갈등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끝내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외치지만, 이미 질서가 무너진 세계에서 그 목소리는 공허하게 퍼질 뿐입니다. 결국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라는 공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생존의 형태를 통해, 도시가 붕괴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계급 구조, 윤리적 선택의 무게, 인간 본성의 적나라함을 깊이 있게 조망합니다.

결론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이라는 극한 상황을 통해 공간이 인간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무너진 서울, 그리고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는 단지 재난의 배경이 아니라, 인간 심리와 권력의 작동 방식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무대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공간이 극한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남을지를 묻는 이 작품은, 단순한 장르영화가 아닌 사회적 질문을 던지는 재난 인문 드라마입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이 붙었지만, 그 속엔 결코 이상적이지 않은 인간의 민낯이 있습니다. 그 공간 속에 내가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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